프로젝트 진행 상황 보고: 2021년 6월

현재 문림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 및 향후 전망에 관하여 보고 드립니다.

한결

안녕하세요. 엑스티입니다. 문림 프로젝트 현재 진행 상황과 향후 계획에 관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늦어졌는가?

먼저 일정 지연에 관해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연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업스트림
  2. 안전 대책
  3. 잡무

첫째는 업스트림 즉 문림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부품들의 공급 지연입니다. 문림은 일반적으로 키보드에 필수적인 키 스위치와 스위치 소켓과 트랙볼에 필수적인 구체와 모션 센서를 비롯하여 접점 베어링, 5방향 스위치, 스틱 캡, 컨트롤러 보드, 접속단자, 다이오드, 배선 등등 매우 많은 부품들로 구성되는 장치이고 이 부품들이 갖추어져야만 완성된 실물이 됩니다. 작년부터 각각의 부품에 대해서 샘플 발주와 선정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만 대부분의 부품이 한국에는 마땅히 공급처가 없거나 부품 하나가 제품가격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수준의 너무 비싼 단가를 요구해서 해외에서 발주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운송에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고 샘플이 부적합할 경우 다시 발주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제가 방광암으로 인해 입원과 수술, 이후 통원을 반복하게 되면서 많은 일정이 더 늦어졌고 이번에는 일부 부품의 샘플 제작 자체가 지연된 것과 잘못 납품된 부품으로 인해 더욱 차질이 발생했습니다.

둘째는 작업 환경의 안전 대책입니다.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저는 방광암에 걸렸습니다. 방광암은 보통 적어도 40대 이상에서 유의미하게 발견이 되기 때문에 30대 초반인 제가 방광에 종양이 생긴 것은 특이한 경우이고, 방광 종양은 재발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환경적 요인이 있는지 찾아서 있으면 없애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방광암의 위험 인자로 꼽히는 것은 흡연입니다. 그런데 저는 평생 담배를 한 번도 피워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작업 환경에서 유해 물질에 노출된 것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납땜을 하면서 발생하는 납땜 연기와 3D 프린터 운용하면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이 가능성이 있습니다. 3D 프린터 관련해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3D 프린터에 쓰이는 PLA 소재는 가열시에 스티렌이 검출되는 것으로 2019년에 조사가 되었습니다. 스티렌은 발암물질이 맞고요. 그래서 이런 유해요소에 계속 노출되는 것이 종양 재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아서 관련 작업을 한동안 못했습니다. 그래서 환풍팬으로 강제 배기하고 초미세먼지 필터와 활성탄 필터 둘 다 있는 공기청정기, 마찬가지로 두 가지 필터 다 갖춘 납 연기 흡입기, 그리고 산업안전보건공단 인증을 받은 산업용 반면형 방독 마스크 등등 작업실 안전 대책을 강구하는 동안 하드웨어는 진행시키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프로젝트를 합법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잡무입니다. 예를 들어 문림 프로젝트는 관할 세무서에 사업자등록이 되어 있고 정기적으로 매입매출의 내역을 제출하고 세금신고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관련업무를 해주시던 분의 사정으로 이번에 기장대리를 해주실 새 세무사 분에게 의뢰를 했는데 자재관리, 재고관리와 관련해 그간의 자료에 미비한 부분이 있고 이것은 세무사 분께서 관심법 독심술로 알아낼 수 없는 영역이므로 제가 직접 추적하고 정리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일들에 치여서 한동안 본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 상황과 향후 계획

문림 프로젝트는 작년 3월에 주문 접수를 했습니다.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나는 20만 원을 냈으니까 좋은 키보드를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지당합니다마는…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작년에 접수한 주문 건수가 약 150 건인데, 20만 원짜리 키보드를 150 대 팔면 매출은 대략 3000만 원이 됩니다. 이 돈으로 재료와 부품을 모두 조달하고 작업실을 운영하고 광열비며 모든 부대 비용을 감당해야 하고, 제가 풀타임으로 문림 프로젝트에 전념한다면 저 자신의 생계도 해결해야 하는 것이죠. 당연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최저임금도 안 되죠. 사실 이 시점에서 풀타임으로 이걸 하겠다는 생각은 접었어야 하는데요. 제가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걸 꼭 잘 좀 해 보고 싶다는. 그래서 빚을 내 가면서 프로젝트에 매달렸죠.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풀타임으로 전념한다면 2020 년 이내에 끝장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전망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러나 여러분 모두 잘 아시다시피 그렇게는 안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금이 바닥나고 생계가 막막해져서 생계 수단을 알아 봐야 하는 처지가 됐고요. 프로젝트에 더욱 전념할 수 없게 되고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그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방광암에도 걸렸고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접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는데요. 제가 지금 문림 프로젝트의 작업실 겸 사무실 겸 제 자취방으로 쓰는 공간이 있습니다. 납땜 연기 등이 발생하는 공간을 격리할 필요가 있어서 이사한 곳인데, 여길 빼고 전세보증금을 돌려 받으면 지금까지 주문하신 분들께 전액 환불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간 일을 더 열심히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골방에 틀어박혀서 일하고 또 일했지만 고지가 눈앞에 보일 만하면 반드시 기어코 복병이 튀어나와서 모든 것이 어그러졌습니다. 이를 악물고 일해서 정말 이제는 더 이상 복병 없겠지, 잘못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렇게까지 배제했는데 더 이상 뭐가 잘못될 수는 없겠지 했더니 암 선고가 나왔습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늘고 있고, 들어오는 메시지는 모두 왜 빨리 문림 안 나오냐는 항의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래서 문림은 언제 나오나요”라는 질문만 하기 때문에 그게 너무 스트레스여서 사람도 한동안 못 만났고, 저의 작업실에는 설계가 잘못된 프레임이며 출력이 잘못된 부품이며 수많은 시행착오의 흔적이 잔뜩 쌓여 있고 성과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사실 저 혼자 쓸 좋은 키보드 하나 만들어서 제가 혼자 즐겁게 쓰고 말았으면 되는데 “나도 그거 꼭 갖고 싶다”라고 열광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듣고 그럼 한번 많이 만들어볼까 했던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이었나 싶기도 했고요. 그냥 다 환불해 드리고 프로젝트 접고 싶다는 생각을 몇천 번 정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트랙볼 키보드를 완성하기 위한 주요 부품들 대부분이 갖춰졌고, 모델링도 되었고, 이 장치가 실제 키 입력 장치 겸 좌표 입력 장치로서 USB 인간 인터페이스 장치로 인식되어서 작동하는 데에 하드웨어적으로 소프트웨어적으로 뭐 배선부터 시작해서 컨트롤러 보드와 광센서 칩과의 통신, 펌웨어 등등 기능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완벽하게 동작을 한다는 것을 문림 II 통해서 기술 실증도 끝났고, 남은 부분은 이제 아직 갖춰지지 않은 필수 부품 두세 가지랑, 제가 열심히 삽질을 하는 것, 그냥 말 그대로 노가다를 하는 것, 무슨 이론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기술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도의 지성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정직한 단순 노동을 시간을 들이부으면 되는 거거든요.

여기까지 와서 그냥 접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입니다.

문림 프로젝트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융자를 받고 있습니다. 상환 기한은 내년입니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프로젝트가 문을 닫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고정된 데드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금은 문림 개발에 사용되었고 어쨌든 제가 갚아야 합니다. 문림 프로젝트가 이 자금을 상환할 수 있을 만큼의 매출을 달성하든지, 아니면 제가 프로젝트를 접고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갚든지 어쨌든 갚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계산을 해 봤습니다. 문림 프로젝트를 계속한다면 최소 200대의 추가 주문을 받아야 내년 데드라인까지 융자금을 상환하는 데에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1. 빠른 시일 내에 추가 주문 접수를 개시하겠습니다.
  2. 추가 주문은 한 달 정도로 기한을 정해서 받겠습니다.
  3. 기한 내에 200대의 추가 주문이 접수되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하고, 주문하신 순서대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실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4. 기한 내에 200대의 추가 주문이 접수되지 않으면 작년 한정판 주문접수와 올해 일반판 주문접수를 통틀어서 주문자 전원에게 전액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데드라인

문림 4의 실사용 동영상을 빠른 시일 내에 공개한다는 공지에 관해, “빠른 시일”이라고 하지 말고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 달이면 한 달, 날짜를 못박아서 좀 알려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만… 당연히 알려드리면 좋은데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니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예를 들어 방광암 같은 것이 터지면 일정이 마비됩니다. 문림 프로젝트에 한 명만 더 있었어도 저의 공백을 어떻게든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습니다. 암처럼 상상도 못한 것이 튀어나오면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다 저의 불찰이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일정이 어그러질 때마다 “왜 본인이 약속한 날짜에 본인이 약속한 것을 하지 않느냐”라는 강한 항의를 여러 통로로 매우 많이 받습니다.

제 생각에도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혼자서 하는 프로젝트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빠른 시일 내”라고 말씀 드리는 경우는 정말로 그 이상 말씀 드릴 수 있는 게 없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 무한정 기다려 달라고 말씀 드리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최종 시한을 정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추가 주문 접수 수량과 무관하게, 만약 8월 말까지 실물 준비와 실사용 동영상 공개가 이뤄지지 못한다면 주문자 전원에게 전액 환불해 드리고, 프로젝트를 접겠습니다.

계속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