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 쿼티 버전

쿼티를 지원하면 더 많은 사용자를 쉽게 문림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결

문림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여러 번 이런 의견을 받고 있습니다. 왜 쿼티를 지원하지 않느냐?

쿼티 배열을 문림 II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예전 글 문림은 B/ㅠ 문제와 무관합니다에서 말씀 드렸듯이 문림은 키 스위치들의 물리적인 위치 자체가 기존 IBM 호환 PC 자판 또는 애플 자판과 다르기 때문에 쿼티 배열을 올릴 수 없고, 쿼티를 올릴 수 없으므로 표준 두벌식 (ㅁㄴㅇㄹ 배열) 한글 자판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림의 이러한 물리적 형상은 누가 결정했느냐? 제가 결정했죠. 그러므로 저를 매우 쳐서 저의 마음을 바꾸면 문림의 물리적 형상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쿼티를 지원할 수 있게 만들면 영 좋겠다는 것입니다.

문림 4 형상 2

여하튼 문림은 딱 보기에도 기존 키보드/마우스와는 딴판으로 생긴 혁신적인 입력 장치입니다. 과연 이런 혁신적인 물건에 적응해서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이런 걱정을 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만약 쿼티를 그대로 쓸 수 있다면 자판 배열을 익히느라 걸리는 시간이 없을 것이므로 적응의 어려움은 대폭 줄어드는 것 아니냐? 편안하고 효율적인 문림의 영 좋은 유토피아로 즉시 무료입장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또 문림은 매우 파격적이고 새로운 물건으로 보이는데 거기에 새로운 배열까지 학습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진입장벽을 너무 올리는 것 아니냐? 한번에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다 뛰어넘겠다는 것은 야심이 너무 큰 것 아니냐? 이런 얘기를 계속 듣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매우 고민스러운 문제입니다. 따라서 의견 수렴의 토대를 겸하여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요약

문림이 쿼티 안 쓰고 새 배열을 쓴 이유를 간략하게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머슬 메모리

muscle memory, 직역하면 근육 기억인데요. 실제로 근육에다가 무슨 기억을 저장하고 인출하는 것은 아니고 기억은 어디까지나 뇌의 소관이지만 대충 어떤 의미인지 바로 파악이 되죠. 우리가 살면서 반복 숙달해서 익숙한 동작은 별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서 수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들 머슬 메모리라고 표현합니다. 입력장치의 사용은 머슬 메모리의 아주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타자가 익숙한 사람들은 키보드를 보지 않고 타자를 치죠. 어떤 글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머슬 메모리입니다.

머슬 메모리도 인간의 학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교정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쿼티 자판을 쓰던 사람에게 운영 체계 설정을 조작해서 OW의 위치를 서로 바꿔 놓고 여기에 적응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좀 헤매겠지만 쓰다 보면 곧 적응할 겁니다. 그런데 그래 놓고 다시 기존 쿼티 자판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또 한동안 헤맬 수밖에 없겠죠. 이것이 말하자면 머슬 메모리 오버라이트입니다. 몸에 밴 동작이 교정을 통해서 “덮어쓰기“를 당하는 것입니다.

즉 기존 키보드를 쓰다가 새로운 키보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키보드만의 뭔가 독특한 특징이 있으면 거기에 새로 적응 기간을 거쳐서 써야 하고, 그 상태로 다시 기존 키보드를 쓰려고 하면 또 적응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이 덮어쓰기의 문제입니다. “인체공학”을 자처하는 키보드들 중 상당수가 이런 덮어쓰기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주류 키보드로 돌아가려고 하면 또 헤매고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저는 실제로 이 프로젝트 하면서 “인체공학 키보드라는 것들은 다 거기에 한 번 익숙해지면 기존 키보드를 못 쓰게 된다“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을 많이 접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죠. 제가 바로 문림과 기존 키보드를 번갈아 쓰는 사례인데요. 랩톱 키보드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문림과 기존 키보드를 번갈아 쓰는 데에 문제가 없거든요. 그렇다면 머슬 메모리 덮어쓰기 문제는 왜 생기는 것이고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것인가?

덮어쓰기를 피할 수 있는가?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예 전혀 다른 새로운 학습을 시키면 됩니다.

보조 바퀴 달린 자전거만 타던 사람이 어느 날 보조 바퀴를 떼고 이륜만으로 타라고 하면 처음에는 중심을 잡지 못해서 고생합니다. 반대로 보조 바퀴 없는 자전거에 익숙한 사람에게 보조 바퀴 달린 자전거를 타게 하면 선회할 때 자전거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 위험합니다.

하지만 자전거 탈 줄 아는 사람이 스케이트를 배운다고 해서 자전거 타는 데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습니다. 혹은 반대로 스케이터가 자전거를 배운다고 해서 스케이팅에 무슨 지장이 생기는 일도 역시 없습니다. 자전거와 스케이트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동작으로 몸에 학습되기 때문입니다.

입력장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쉬운 예로 두벌식 자판과 세벌식 자판이 있습니다. 한국은 “ㅁㄴㅇㄹ 배열”의 두벌식 자판이 표준이기 때문에 세벌식 자판 사용자라 해도 대부분은 두벌식 자판으로 컴퓨터의 세계에 입문한 뒤 어쩌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세벌식 자판을 추가로 배운 것입니다. 세벌식 사용자들은 대부분 두벌식도 무리 없이 씁니다.

이것은 세벌식이 두벌식과 워낙 판이해서 별도의 머슬 메모리로 학습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초성과 종성을 구분하는 것부터 두벌식과 사상 자체가 다르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단순히 글자 위치만 따져도 겹치는 부분보다 어긋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문림에도 적용되겠죠. 문림 4를 변형해서 쿼티 자판 배열을 구현할 수 있도록 만든 새 설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면, 얼핏 보기에 문림 4보다는 그게 더 온건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문림 쿼티야말로 훨씬 더 도전적인 물건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매우 반직관적으로 들립니다. 사실 이게 쉽게 설득이 안 되니까 이런 글도 쓰고 있는 것이죠.

병행 사용

전 소프트웨어 개발자 출신입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것은 아마도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직업 중에서 IT 장비 선택이 가장 자유로운 축에 들 겁니다. 그런데 어떤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문림을 보고 그 위대한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아 즉시 주문하고 애지중지하며 문림 실력을 연마함으로써 강호의 문림고수가 되었다고 칩시다. 개발자들이 회의실에 회의하러 갑시다 해서 다들 랩톱 들고 모이는데 랩톱에 문림까지 얹어서 들고 갈 것이냐? 문림은 심지어 좌우 분리로 유닛이 두 갭니다. 보통은 들고 가지 못할 것이란 말이죠. 너무 귀찮아서. 그러면 회의실 들어가서는 랩톱 키보드 써야 됩니다. 장비의 선택이 자유로운 사람들도 기존 키보드를 때로는 써야 된다는 것이죠.

장비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예를 들어 관공서에서, 은행에서, 군대에서, IDC에서, 기업체에서, 보안을 중요시하는 여러 부서에서, 기타 등등에서 지급된 PC에 연결된 지급된 주변기기를 써야 합니다. 문림 가져와서 쓸 수 있는가?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군대에서 USB 키보드도 아무거나 못 꽂거든요. 등록되지 않은 USB 장치 꽂으면 바로 어딘가에 로깅되고 나중에 상급부대에서 문서로 추려서 내려보내고 질책합니다 이거 뭐냐 해명하라고. 그러면 결국 이 사회에서 대다수 유저들은 기존 키보드와 공존을 하고 병행 사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문림만 단독으로 쓸 수는 있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다수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림은 필연적으로 문림 단독 사용이 아니라 기존 키보드와 문림을 병행 사용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 사용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별도의 머슬 메모리로 학습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림 같은 혁신적인 인체공학 입력장치들이 아직 시장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런 병행 사용과 적응, 머슬 메모리 덮어쓰기로 인한 문제는 이미 쉽게 볼 수 있죠. 예를 들어 윈도와 맥이 그렇습니다. OS 단축 키가 서로 다릅니다. 이것 때문에 한 시스템을 오래 쓰다가 다른 시스템을 쓰려고 할 때 스트레스를 받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주 흔한 풍경입니다. 특히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쓸 때 이 문제가 심합니다. 같은 앱을 다른 OS에서 띄우면 일부 단축 키만 미묘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단축 키는 중요합니다. 요즘이야 애플리케이션이 각자 이런저런 대비를 해 놔서 좀 낫습니다만 예전에는 단축 키 하나 꼬이면 생산성 좀 깎이는 정도가 아니라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작업물 날려 먹고 사고도 많았죠. 지금도 그런 위험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요.

문림이 “머슬 메모리 덮어쓰기” 문제를 가장 심하게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문림 쿼티입니다. 이 부분은 “쿼티 유지”를 지향한 인체공학 키보드들을 살펴 보면 명백해집니다.

쿼티 지원하면 적응이 빠른가?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요. 별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문림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 저는 원래 저의 필요를 만족하는 입력장치가 시장에 하나쯤은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찾아서 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런저런 (자칭) “인체공학” 키보드를 구해서 써 보기도 했습니다.

“키 배열면이 쿼티인 좌우분리 인체공학 키보드”라는 개념은 이미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저도 써 봤습니다만… 쿼티를 쓴다고 해서 진입 장벽을 낮춰 주고 러닝 커브를 수월하게 해 주는 효과가 없습니다. 제 개인 의견이 아니라 대부분의 제품이 실제로 “일주일 정도의 적응 기간“을 예상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일주일이라는 것은 두벌식 사용자가 세벌식을 익히는 데에 일반적으로 걸리는 기간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자판을 익히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문림인데 자판만 쿼티”의 함정

그리고 이런 “인체공학 키보드”들은 모두 한 번 익숙해지면 기존 키보드를 쓸 때 큰 불편을 일으킵니다. 쿼티 자판이라고 하지만 사실 Q, W, E, R, T, Y 같은 키들의 위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페이스도 시프트도 엔터도 백스페이스도 모두 타자에서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는 키들입니다. 그러니까 쿼티를 유지한다는 게 말은 유지라고 하지만 심각한 변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알파벳은 그대로 있으니까 머슬 메모리 덮어쓰기가 심하게 일어나고요. 그러니

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적응도 그다지 쉽고 빠르지 않은 것입니다. 단점만 있는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인체공학 키보드를 한다는 것은 키 위치를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키 위치를 덜 바꿀수록 기존 키보드에 가까워지겠지요. 그러나 덜 바꾸는 것이 목표라면 그냥 기존 키보드를 쓰면 되지 않을까요?

문림의 핵심은 리프트리스 개념입니다. 기본 위치에서 손을 떼지 않고 모든 입력점에 도달하려면 당연히 모든 입력점의 위치에 막대한 조정이 불가피합니다. 쿼티 자판의 중심부만 온존하려 해도 좌우 각 6칼럼씩은 필요합니다. 문림은 지금도 엄지와 검지의 가동범위가 겹치는 곳에 트랙볼과 키 배열면이 서로 공간 다툼을 하고 있어 부동산 전쟁이 치열합니다. 저는 제법 긴 시간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림의 설계를 개선하려고 발버둥쳐 왔습니다만

  1. MX 호환 기계식 스위치를 쓰면서
  2. 키 배열면에 6칼럼을 두고
  3. 모든 키를 기본 위치에서 도달 가능하게 하면서
  4. 엄지가 편하게 닿는 곳에 트랙볼을 두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손가락의 가동 범위라는 것은 근골격해부학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제약 조건입니다. 입력장치의 설계를 개량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죠.

문림 쿼티를 만든다면 거기서 쿼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당연히 기존 키보드와 겹칠 겁니다.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매우 심각하게 다를 것이고요. 예를 들어 시프트나 백스페이스의 위치는 엄지 방면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프트와 백스페이스를 둘 다 소지 위치에 유지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물리적으로 그런 공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인체공학 키보드를 자처하는 시중의 제품 대부분이, 특히 배열면의 기울임이 적용된 경우에는 6칼럼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알파벳 키의 위치는 쿼티를 유지하고 스페이스, 백스페이스, 시프트, 엔터 등의 위치만 엄지 영역 쪽으로 옮기는 구성이 됩니다. 그야말로 머슬 메모리 덮어쓰기로 인한 스트레스를 극대화하는 구성입니다. 이게 문림 쿼티라면 문림 쿼티와 기존 키보드를 병행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머슬 메모리 상호 간섭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할 겁니다.

따라서 문림 4와 문림 쿼티를 비교하면 문림 쿼티야말로 극히 대담하고 도전적이고 야심 넘치는 물건입니다. 문림 쿼티는 사용자의 머슬 메모리를 덮어쓸 수밖에 없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즉 문림 쿼티는 한 번 쓰기 시작하면 기존 키보드는 전혀 쓰지 않겠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문림 쿼티”를 내지 않고 4칼럼에 쿼티와 완전히 동떨어진 “문림 4”를 만든 주된 이유입니다. 문림 4는 기존 사용자를 배려하지 않고 과격한 혁신을 추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기존 사용자를 최대한 배려하려고 쿼티와 다르게 해서, 머슬 메모리 상호 간섭을 회피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서 배치의 제약을 벗어나 인체공학의 극한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일입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머슬 메모리에 대한 상호 간섭을 회피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입니다.

정말 쿼티를 쓰셔야 하나요?

게다가… 쿼티입니다.

물론 쿼티를 쓰시는 여러분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보화의 대열에 동참하던 역사적인 그 순간! 인체공학의 신이 나타나서 다양한 자판 배열의 장단점과 약관의 주요 내용 및 특약사항을 설명한 뒤 쿼티로 입문함에 동의서를 받았는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그냥 쿼티 자판이 일방적으로 주어졌을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으로 과제든 업무든 모든 것을 처리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이 이제 와서 새로운 자판 배열을 배워 익히라는 요구에 망설임을 느끼는 것도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키보드를 처음 쓰던 시절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서 매우 고생스러웠던 사건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 짓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하면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실제로는 컴퓨터에 입문하면서 배울 게 많았던 부담이 다 합쳐져서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지만, 막연한 두려움은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기왕에 여러분이 문림이라는 혁신적인 새 입력장치에 관심을 가질 만큼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이고 선도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로서 이 점을 한 번 검토해 주십사 청하는 것입니다. 입력장치에 새로 적응하는 것은 개인차가 있으나 대체로 일주일이면 됩니다. (물론 하루에 몇 시간을 쓰느냐에 따라 더 짧아지거나 길어집니다만.) 적응 기간 동안에 키보드를 못 쓰는 것도 아닙니다. 기존 키보드와 병행해서 쓰시면 됩니다.

쿼티를 떠나는 데에 일주일이면 충분히 저렴한 비용이지 싶습니다. 쿼티는 악명이 높습니다. 쿼티는 엄청나게 낡은 배열입니다. 쿼티의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배열은 무려 150년 전에 나왔습니다. 현재의 쿼티 배열이 확립된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140년이 넘습니다. 그 뒤로 기나긴 세월이 흘렀고 키보드의 역할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해졌고 키보드 사용자 수도 어마어마하게 폭증했지만 쿼티는 실질적으로 바뀐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판 배열은 정량적으로 평가가 가능합니다. 번갈아치기, 운지거리 등등은 자판 배열과 입력 텍스트가 주어지면 결정론적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쿼티는 모든 척도에서 형편없는 점수를 보입니다. 쿼티의 비효율은 수치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것입니다. 쿼티의 장점은 뭘까요? create database를 왼손만으로 입력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쿼티의 장점일까요?

쿼티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는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쿼티가 기계식 타자기를 위해 고안되고 개량된 배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쿼티가 타자 도중에 금속 레버와 잉크 리본 등의 내부 구조가 엉키는 이른바 잼(jam)을 되도록 줄이는 키 배치를 추구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습니다. 매우 널리 퍼져 있는데 뒷받침할 증거가 없습니다. 모두 설일 뿐입니다.

사실 인류는 쿼티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예를 들어 쿼티 배열을 만드는 데에 영어 알파벳 빈도 분석 자료가 사용되었다는 설, 특히 바이그램 빈도를 참고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자주 붙어 다니는 글자를 되도록 서로 떨어뜨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설계 목표가 있었다면 최소한, 아무리 못해도 영어에서 가장 자주 붙어 등장하는 바이그램 1위에는 적용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1위인 T와 H는 인접해 있습니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E와 D, 또는 E와 R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합니다. 150여년 전의 옛날에, 정보화 시대의 여명도 한참 전에,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조촐하게 시작된 발명입니다. 뭐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맞아떨어지는 설명이 없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결론은 쿼티가 대체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제 와서는 밝힐 방법도 없으며 그냥 해괴망측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압도적 절대 다수는 아직도 그냥 그것을 계속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행마다 키들을 엇갈리게 배치한 것은 내부에 금속 레버를 배치하고 압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가 맞습니다. 이것은 쿼티를 채택한 초창기 타자기의 실물로부터 쉽게 파악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손가락의 자연스러운 굴곡/신전 운동만으로 키를 누를 수 없고 불필요한 횡적 운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만 해도 인체공학을 논하기 이전에 애초에 그다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배열 같지 않습니다. 문림의 사상은 “인간이 기계에 적응할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에 적응하여야 한다”인데, 쿼티야말로 “인간이 기계에 적응할 것을 강요하는”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계식 타자기에 적용되는 모든 요구사항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기계식 타자기와 컴퓨터 자판이 같은 배열을 가져야 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쿼티 배열을 쓰는 레밍턴 기계식 타자기가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자 전신타자기도 타자수들이 쿼티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쿼티를 채택하고, 전자계산기를 제어하는 자판도 사용자들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쿼티를 채택하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쿼티야말로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의 교과서 예시입니다.

한글 자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준 두벌식은 빈도 분석이 반영되지 않은 비효율적인 배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트맵을 그려 보면 기괴한 두벌식의 특징이 바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쿼티보다 나은 배열, 표준 두벌식보다 나은 배열은 이미 잔뜩 제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의 점유율을 합쳐도 아직 미미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값비싼 초기 학습 비용에 비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불확실하고 비가시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오늘 당장 마감을 쳐야 하고 바쁜데 자판 배열을 다시 익힐 여유가 없다는 것이죠. 더 좋은 배열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쉽사리 시도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배열을 바꾸는 것은 보통 OS 설정을 바꾸는 등 소프트웨어로 해결하게 되는데 이것은 좀처럼 깔끔하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애플리케이션 중 반드시 한 녀석은 자판 배열을 쿼티로 간주하고 동작해서 말썽을 일으킵니다.

결론

그렇다면 문림이야말로 기회가 아닐까요? 문림이라는 하드웨어가 손에 들어온다면 이것을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문림은 편안하고 효율적인 리프트리스 인체공학 입력 장치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에 맞게 자판 배열도 편안하고 효율적인 새 배열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문림을 쓴다는 것은 입력장치 사용의 전면적인 변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하죠. 완전히 새로 배우는 김에 새 배열도 익히고, 독수리 타법을 쓰시는 분은 그것도 고치고… 좋은 타자 습관을 머슬 메모리에 입력하면 좋지 않을까요? 일주일만 투자하면 남은 평생이 편해질 기회인 것입니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저는 그냥 문림 4를 사실 것을 권하고 싶군요.